불교유적

  • 지정번호 : 경북 유형문화재 제 47호
  • 지정년월일 : 1974년 12월 10일
  • 소재지 :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247

청량사 유리보전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 한 가운데 자리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동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 고찰로 한때는 연대사를 비롯한 27개의 암자가 있어서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증·개축하였다고 전해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건물의 구조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다포계인 듯하면서 주심포계와 절충한 양식을 하고 있어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공포는 외1출목 내 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 및 용수형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정면 중간기둥위에는 용두와 용미를 주두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다. 내부는 판상이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천장에는 운궁이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의 큰 보 밑에 간주를 세워 후불벽을 구성한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불단에는 건칠불로 알려진 약사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인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응진전

현재 청량사(淸凉寺)의 부속 건물로 금탑봉 중간 절벽에 위치해 있다. 금탑봉 중간절벽 동석(動石)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청량사의 부속 건물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맞배기와집으로 내부에는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앞뒤가 모두 천길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뒤쪽 절벽위에는 동풍석(動風石)이 요사체 옆의 절벽 사이로는 감로수(甘露水)가 흘러나온다. 또한 법당 앞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주세붕은 자신의 자(字)를 따서 경유대(景遊臺)라 이름하였다.

태자사 낙공대사 백월서운탑비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의 왕사(王師)였던 낭공대사(崔行寂, 832-916)의 행력을 기록한 탑비로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태자초등학교 교정(太子寺 터 부근)에 있다. 현재 비신은 없고 방형의 지대석위에 귀부를 얹고 그 위에 이수를 올려놓은 형태로 있다.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은 한림학사를 역임한 최인연(崔仁?)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金生, 711-791)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을 고려 광종 5년(954)에 세웠다고 한다. 이 탑비가 청량산 부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김생이 청량산에 들어와 글씨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즉 태자사지는 청량산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탑비의 글씨를 집자하는 것이 유리하였다는 점과 이세택(李世澤, 1716-1777)이『청량지(淸凉誌)』를 간행할 당시(1771년)만 해도 김생이 쓴 금은자불경이 연대사에 남아 있었다는『청량지』의 기록을 통해 청량산에서의 김생의 행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지

청량산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청량산에는 연대사를 중심으로 대소의 20여개의 암자가 있어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청량산록』에서는 자소봉 아래 11개, 경일봉 아래 3개, 금탑봉 아래 5개 등 19개 암자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1608년에 간행된 『영가지』에는 7개의 암자가 추가된 25개, 그리고 1771년에 간행된 이세택(1716-1777)의『청량지』에서는 25개의 암자 중 11개가 없어지고 14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의 발달과 유교의 보편화로 인해 점차적으로 폐사되어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 현존하고 나머지는 절터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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