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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땅

봉화는 조선시대 사화를 피해 온 선비들의 상처를 품어준 곳이었습니다.

 

조선 중기 임금이 신하를 죽이는 사화(士禍)가 휘몰아칠 때 한양을 근거로 살아가던 많은 선비들이 가족과 함께 경북 북부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난세를 피해 은둔할 곳을 찾아 나선 선비들에게 봉화(奉化)는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었고, 봉화(奉化)는 그들을 큰 산 속 깊은 곳으로 품어주었습니다.

충재 권벌선생이 학문과 후진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던 봉화 닭실마을 모습

충재 권벌선생이 학문과 후진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던 봉화 닭실마을 모습

 

그중 기묘사화(己卯士禍) 절개의 개혁파로 잘 알려진 충재 권벌선생도 파직당하여, 봉화 닭실 마을로 옮겨 살게 되었습니다.

충재는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부를 때까지 이곳 닭실에서 은거하며 15년 세월을 보냅니다. 그는 49세(1526) 무렵에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10년 동안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노력을 기울였죠.

 

봉화군 거촌리 쌍벽당의 전경이다. 성리학자 쌍벽당 김언구 선생의 유덕을 기리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선생은 연산군 폭정으로 이곳 봉화에서 향리를 맡으며 후진양성에 힘쓰셨다.

봉화군 거촌리 쌍벽당의 전경이다. 성리학자 쌍벽당 김언구 선생의 유덕을 기리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선생은 연산군 폭정으로 이곳 봉화에서 향리를 맡으며 후진양성에 힘쓰셨다.

 

이렇듯 권력과 세도의 거친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는 삶보다 지방의 산천, 강이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교육과 수양의 삶을 선택했던 조선 중기의 선비들, 그들은 후세를 기약하며 봉화(奉化)에서 글을 가까이하고 인성을 개발하며 낮은 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현대의 봉화(奉化) 는 귀농인들의 제2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도시의 회색 콘크리트 속에서 또 거친 삶을 살아가다 지친 도시민들에게  봉화(奉化) 는 사계절 분명한 색깔로 그들을 맞아주고 품어주고 있습니다. 군(郡)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넓을 땅 봉화, 대부분이 높은 산이며 그 산 사이 사이를 낙동강이 푸른 색 물결을 햇살에 반짝입니다.

 

봉화군은 분명한 자세로 자연을 더 보호하며, 자연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귀중한 선물로 여길 것입니다. 봉화로 오세요. 봉화(奉化) 는 자연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보장할 것입니다.

 

봉화군 운곡천의 전경. 강과 산이 상처를 입은 선비들의 마음과 몸을 품어주었다.

봉화군 운곡천의 전경. 강과 산이 상처를 입은 선비들의 마음과 몸을 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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