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갈산 1리
상세내용
큰 마
재산 소재지로 부터 1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갈산의 여러 동네중 가장 큰 동네라 하여 큰마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동네 뒤에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앞에는 큰 개울이 흐르고 있어 농사짓기에 알맞으며 마을이 평지이고 전답이 많아자연 사람들이 모여들어 큰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고추와 담배를 주로 재배하며 인심도 좋아 살기 좋은 마을이다.
학다리
연대 미상으로 영양의 안동권씨가 天子公(천자공)의 벼슬을 하고 죽음으로서 풍수에게 묘터를 알아본 즉 갈산 1리 학다리 마을 뒷산에 묘를 쓰면 자손대대 번창한다고 하여 묘를 쓰려고 삽질을 하니 그 밑에 딱딱한 암석이 받혀 그 암석을 파내려고 두드려 보니 그 속에서 학 4마리가 나왔는데 한마리는 옥쇄로, 두번째는 묘곡으로, 세번째는 성황당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지막 학을 덮쳐 다시 그 바위에 넣고 그 위에 묘를 쓰니 자손대대로 번창하였는데 그 곳을 학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가못
권학달씨가 약 1910년경 이곳에 술도가를 설립. 운영하면서 한 두집 모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 마을을 도가못이라 불려지게 되었으며 갈산 큰마와 학다리 사이 도로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8가구가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다.
정자(亭子)마
갈산 큰마와 마주보고 있으며 조선 순조 병조참판을 지낸 葛川(갈천) 金熙周(김희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져 정자를 건립한데서 부터 정자마라 부르게 되었으며, 앞에는 葛山川(갈산천)이 유유히 흐르고 뒤에는 전답이 많아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정자가 葛川亭(갈천정)인데 정자 앞에는 200년 이상 된 물프레 나무가 한결 옛 정취를 더해주고 있는 이 마을은 벼와 고추를 주로 재배하며 8가구가 모여 풍요롭게 생활하고 있다.
잿마 현촌(峴村)
갈산 서쪽 산비탈에 위치한 마을로 이 마을을 가려면 才山川(재산천)을 건너 작은 재를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아래에는 재산천이 흐르고 있다. 이 마을은 북향을 향해 있으며 병풍처럼 드리워진 큰 산 앞면에 위치해 있다. 골이나 특이한 지명도 없으며, 예전에는 많은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5가구가 고추와 담배를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앞에는 재산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더욱정취를 더하고 있다.
공이(公利) 공리곡 (公利谷)
公利(공이)에 대한 정확한 유래와 생성 년대는 알 수 없으며, 이곳에는 좋은 묘터가 있어서 마을 전체를 안위하는 형상을 이룬다하여 公利谷(공리곡)이라 불렀으며, 선내천이 흐르고 산능선을 따라 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재를 아래공이 재라 하고 현재의 공이재와 합해서 양공이재라 불러 왔으며, 그 사이의 마을을 공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재산면 갈산리와 소천면 임기리를 연결하는 919지방도가 지나는 교통의 아주 중요한 곳이며 아래공이 4호와 웃공이 8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가 점차 줄고 있는 실정이다.
쇠실. 상금곡(上金谷)
옛날 이곳에서 나온 광물이 금과 같이 귀하게 평가되어 金谷(금곡)이라 불렀으며 또한 쇠실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3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고 10여 호가 드문드문 생활하고 있으며 고추와 콩을 재배해 근근히 생활하고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에도 세찬 바람은 불지 않은 곳이다.
새골,새봉 봉곡(峰谷)
정확한 년대는 알 수 없으며, 바람이 적고 기후가 온화하여 새들의 서식지로 알맞아 새들이 많이 서식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당시 어떤 새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13가구가 모여서 주로 담배, 고추를 재배하며 이농현상으로 농가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무너무
정확한 유래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갈산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데 폭이 좁아 장마철이나 폭우로 물이 자주 넘어 내왕을 할 수 없었다 한다. 물이 자주 넘어 처음 물너머 동네라고 하다가 쉬운 발음으로 변하여 무너무로 되었으며, 지금은 큰 다리가 놓여져 있어 물이 넘는 일이 없으며 예전에는 2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4가구만이 전작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산간 오지마을이다.
골내골 화천(華川)
냇가와 산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이 곳은 강변에 진달래 꽃이 많이 피었는데 그 진달래 꽃잎이 하천을 따라 아래로 흘러 강물 위에 어리어 꽃 냄새를 낸다 하여 골레골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또 달리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통일신라 후기 국운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태자가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 주어야하는 비운을 짊어지고 백성들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 마의를 걸치고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청량산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던 도중 남루한 옷을 입고 빨래를 하는 처녀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일국의 태자보다 꽃잎이 그윽한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처녀가 훨씬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진달래 꽃이 가득한 개울을 보고 골레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 17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 버려 폐허로 변해 버렸으며 전답은 모두 황무지로 변한지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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